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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 최재화 목사와 독립운동 (1)

[ 2019-03-29 14:25:08]

 

< 최재화 목사>

한국기독교와 3.1운동100주년기념세미나

김남식 박사 (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서론

한 사람의 생애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살아간 시대적 배경과 그 사람의 활동 영역을 함께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존재라고 한다.

백은 최재화(白恩 崔載華) 목사는 이 땅의 선각자로서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서 활동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일제(日帝)는 두 차례의 궐석재판을 통하여 모두 8년의 징역을 선고하였다. 31만세운동과 두 차례에 걸친 이른바 '최재화 사건'으로 도합 8년의 징역 선고를 받은 것이다.
최재화 목사는 중국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공부를 하여 목사 장립을 받았다. 석방은 됐지만 궐석재판의 시효가 지나지 않아 귀국을 하지 못하고, 만주 지방과 산동(山東)지방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대구 남성정교회(오늘의 대구제일교회) 목사로서 이른바 '이만집 자치파 파동'을 수습하고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최재화 목사는 부산의 부산진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해방을 맞았고, 해방 후 그의 주도로 온건적 교회재건운동이 일어났다. 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교정(敎政)의 일선에서 활동하였고, 목회와 교육 등을 통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그의 발자취를 추적함으로써 역사의 거울에 비친 모습을 그려보자.
 
. 독립운동가 최재화
 
1. 그의 고향, 입신(入信) 그리고 유학

최재화는 18921218, 경북 선산군 해평면 산양리에서 아버지 최도원(崔道源) 씨와 우서원(禹誓原) 씨 사이에서 3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산(善山)은 예부터 많은 학자들이 태어난 곳이었고, 선산 향교, 해평 향교, 금오서원, 월암서원 등이 있어 유교의 전통이 강하게 유지되었고, 이차돈의 순교사화가 얽힌 도리사(桃李寺)를 비롯한 불교의 사찰들이 이 지방의 전통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최재화는 부모의 농사일을 도와가며 서당에 다니면서 글을 배웠다. 그의 삶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 것은 복음과의 접촉이었다. 선산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901년으로 미국인 선교사 부해리가 고아면 괴평동에 교회를 설립한 데서 시작된다. 1904년에 선산읍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최재화의 고향 산양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1907년이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안의와(Rev. James Edward Adams) 목사가 그 때 선산지방은 순화 전도하였고, 그의 조사(助事)인 서지명(일명 서면욱)이 산양리에 와서 복음을 전하였다. 부해리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의 복음을 접한 최재화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 후, 최재화 목사는 1909년에 안의와 선교사의 주선으로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시골 출신의 소년이 서울의 문물을 접하게 된 일은 하나의 경이였다. 최재화 목사는 안의와 선교사가 보내주는 학비로는 부족했기에 스스로 일을 해야 했다. 입학 후 그는 경신학교 교감이던 김규식(金奎植) 선생의 도움으로 게일(Gale) 선교사 집의 보일러실에 석탄을 넣는 일을 하게 되었다. 시골에서 농사도 지었고, 남들보다 기골이 장대했던 최재화에게 이것은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스스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하여 1914년에 경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20세가 되던 1913년에 최재화 목사는 금산동 김우용 씨의 딸 금심(今心)과 결혼하였다. 학생의 몸이지만 부모가 정혼해 주는 대로 혼인을 하였다. 신부는 김해 김씨 집안으로서 신랑보다 한 살 위였으니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결혼이었다.
경신학교를 졸업한 최재화는 진주 심상소학교 훈도로 부임하여 1년간 재직하였다. 청년 교사 최재화는 열성을 다해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그는 더 많이 배워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더 넓은 세계를 꿈꾸게 되었다. 그 때 안의와 선교사가 주선하여 주겠다고 하던 미국 유학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 유학의 길을 찾기 위해 선교사들의 조언을 구하기도 하여 그 나름대로 계획을 하였다.
1년 동안의 소학교 교사생활은 최재화로 하여금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하였다. 자신의 부족함과 함께 나라 잃은 백성들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고 자신의 장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위하여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열망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미국 유학을 목표로 하였다. 그것은 선교사들과의 친교를 통한 미국에의 동경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의와 선교사를 비롯하여 경신학교의 언더우드 선교사 등과의 교류가 그의 결심에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
최재화는 안의와 선교사를 찾아가 유학을 주선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부모의 허락을 받으라는 안의와 선교사의 연락을 받고 부모님께 의논하였지만 그의 부모는 완강히 반대하였다. 결혼을 하여 가정도 이루었고 소학교 교원을 할 정도로 공부를 했으면 됐지 않았느냐는 이유였다.
그러나 최재화의 끈질긴 설득으로 그의 부모도 마침내 허락을 했고 그는 미국으로 가기 위해 1915년 가을, 기차 편으로 우선 중국 상해로 향하였다. 당시는 미국으로 바로 가는 여행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가는 길을 택해야만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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