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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발전의 기초를 놓은 이영수 목사

[ 2012-04-09 11:51:22]

 

<이영수 목사>

●총회와 총신대 발전의 기틀 마련

●양지 캠퍼스 조성, 총회회관 건립, 통일찬송가 발행 등 큰 업적 남겨

●이영수 목사에 대한 재조명 필요

 

 

 

어느날 이영수 목사가 총신대 사당동 캠퍼스로 필자를 찾아왔다.

'정 교수, 어렵겠지요?'

'예. 목사님, 그렇습니다.'

'할 수 없지요 뭐. 한번 더 해보라고 하지요.'

누가 들으면 선문선답 같고, 간첩의 암호교환 같은 대화를 한 후 헤어졌다.

이 목사가 필자를 찾아온 것은 딸의 대학원 입학 때문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총신대 대학원 기독교교육학과에 응시하였고 필자는 그를 불합격시켰다.

젊은 교수의 용기라고 할지 아니면 세상 물정 모르는 원칙주의자의 소치인지 분간할 수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당시의 이영수 목사는 우리 교단의 실세 중 실세이고, 총신대학의 실제적 운영자라고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딸을 불합격시키고 나니 정치에 민감한 동료 교수들이 혹시 무슨 불이익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고 염려를 했다. 그러나 그의 딸은 학부과정의 기독교교육과 과목을 1년간 청강하며 준비한 후 이듬해 대학원에 입학하였으며, 이 목사는 필자에게 어떤 불이익도 주지 않고 더욱 관심을 가져 주었다.

 

극단의 평가들

 

이영수 목사가 1987년에 소천하였으니 세월의 흐름이 빠르다. 이 목사가 소천한지 20년이 지났으나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극단적으로 나누어져 있다. '정치꾼'으로 매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의 강한 리더십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많다.

필자는 이 목사의 아들과 딸을 가르친 경험이 있다. 아들은 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졸업생이고 딸은 총신대학교 대학원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했다. 그 두 남매는 모두 수줍고 조용하고 얌전하고 예절 바른 학생이었다. 우리가 흔히 자녀를 보면 그 부모를 안다고 하는데, 이 목사의 자녀들을 보면 이 목사에 대한 악평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필자는 정치를 잘 모르고 정치하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평가란 자신의 관점에서 하기 때문에 객관성이 결여될 수가 있고, 자신의 전이해를 바탕으로 규탄하거나 칭송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에게 이영수 목사는 어떤 존재였을까? 이따금 그를 생각하며 교단과 총신의 암담한 현실을 바라본다.

 

젊은 시절의 꿈

 

이영수는 1928년에 경북 봉화군 청양면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경북 제일의 오지였고 모친의 신앙생활로 인하여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해방이 되자 경북 북부지역 교회의 지도자인 이원영 목사의 신앙적 감화에 따라 경안고등성경학교(오늘의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로 졸업하고 총회신학교에 입학했다.

이영수는 기숙사에서 박경남과 한 방을 사용하였다. 박경남은 이영수의 준수한 모습, 조용한 성품, 예절 바름에 반하여 자신의 사촌 처제 김갑덕을 소개하여 결혼케 하였다. 그때 김갑덕은 대구 신명여중․고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다.

이들이 처음 만났을 때 이영수는 수줍음을 타서 얼굴이 붉어지고 김갑덕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영수의 후기 모습만 아는 사람들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이영수는 1954년 총회신학교를 제4회로 졸업하였다. 그후 목사 안수를 받고 군목으로 복무하였다. 당시 그의 장래 희망은 미국 유학이었다. 동기생 가운데 이원설, 이상찬 등이 유학을 떠났고 그도 유학의 꿈을 꾸게 되었다. 당시에는 신학교 교장이 추천하면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데 당시 교장은 '경상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추천해 주지 않았다. 여기서 그의 인생이 달라지게 되었다.

 

교단 정치의 중심으로

 

이영수는 대구 봉산교회의 청빙을 받아 1959년부터 1969년까지 10년간 시무하면서 그의 능력을 펼쳐나갔다. 그후 대전중앙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양화석 목사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교회 부흥을 위해 헌신하였고, 새성전을 건축하는 등 놀라운 사역을 담당하였다.

이 시기에 이영수는 교회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이른바 <이영수 시대>를 일구어 나가며 총회의 각종 일들을 주도해 나갔다. 여기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양극단에 속한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그의 공헌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일만교회운동의 전개

 

1973년 여름에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빌리그래함 전도대회>가 개최되어 100만 명의 신도가 회집하는 기적 같은 모습을 보였다. 1974년 8월, 한국대학생선교회(CCC)가 주최하는 <엑스플로 74>가 준비되는 즈음에는 이영수를 중심으로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1974년 1월 17일, 교단의 지도자 20여 명이 유성에서 회집하여 교단의 진로와 정책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이영수 목사가 주도한 이 모임은 비생산적인 교권 쟁탈전을 지양하고 교회의 힘을 전도에 집중하고, 국내외 정책에 대해서도 적극성을 갖기로 하였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바로 <일만교회운동>이다. 이 모임의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우리 총회의 총화를 열망한다.

2. 우리는 80년대까지 일만교회 운동을 전개한다.

3. 우리는 국내외 정책에 있어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러한 합의가 그 해 9월 총회에서 교단 정책으로 채택되어 교회성장운동과 개척운동의 견인차가 되었다. 이영수 목사는 일만교회운동의 실행위원회 기획실장을 맡아 전국 교회로 하여금 교회개척을 하도록 독려하였다. 전국적인 순회집회, 교단소속 부흥사들의 집회 인도, 도시교회와 노회들은 의무적으로 개척교회를 설립케 하였다.

이 운동은 숫자상의 <일만교회>보다 교회와 교인들의 개척전도 열의를 고양한 데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운동을 위해 총회 기관지 「기독신보」가 지속적인 홍보를 함으로써 교회의 관심을 모으게 했다. 이 운동은 합동측의 개척운동으로 자리잡았고, 이것이 자극제가 되어 타교단에서도 <오천교회운동> <삼천교회운동> 등을 전개하여 1970년대의 교회성장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선교운동의 전개

 

이 목사는 대전중앙교회에서 시무하면서 1983년에 정홍권 선교사를 미국의 흑인들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했고, 1985년에는 김효곤 선교사를 독일에 파송하여 계속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또한 개교회에서만이 아니라 교단차원에서도 선교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초교파적인 선교단체 협력에 적극 동참하였다.

그는 1982년 11월에 총회선교부장으로 있으면서 해외선교를 위한 선교사 양성기관인 총회직영 선교훈련원을 설립하는 데 앞장섰다. 이 목사는 설립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원장에 손영준 선교사와 교수진 및 실무를 맡을 사무직 인선을 주도하였다. 그는 또한 1972년에 조직된 한국해외선교단체협의회 회장으로 1983년에 피선되어 해외 선교를 위한 한국 교회의 활동에도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총회회관 건립

 

누가 뭐라 해도 이영수 목사의 업적 가운데 지금까지 가시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난 것 중 하나는 총회회관의 건축이다. 이 목사는 총회 일만교회운동을 주창하면서 교단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이 목사는 장로교 장자교단을 자처하는 총회가 총회회관 하나 없이 셋방으로 전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총회회관 건립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59년 총회가 분열되면서 당시 막대한 재산을 소유했던 선교부가 통합측으로 가버린 이후 총회는 총회회관이 마련되지 않은 관계로 장충교회, 종로에 있는 일양빌딩 6층의 62평을 임대하여 사용하였고, 또한 용산구 동자동의 임대사무실을 쓰는 등 여러 곳으로 전전해야만 했다.

총회회관은 1968년 제53회 총회에서 결의되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3년 7월에 마침내 여의도동 1-708번지의 203평의 부지를 매입함으로 총회센터 건립의 길이 열렸다.

그후 이 목사가 총회유지재단 이사장으로 총회를 섬기면서 1980년 말에 이곳에 지하 2층 지상 10층의 회관을 건축하기로 했으나 각종 건축규제가 심함으로 이 부지를 매각하고, 1981년 8월에 당시로서는 허허벌판이었던 강남구 대치동 산 36-4번지에 560여 평의 현 총회회관 부지 매입을 주도하였다. 이때 반대세력들은 이 목사의 독단과 무모한 사업계획을 우려하고 재정적 도움을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나 이 목사는 이곳이 서울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이 목사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총신대학교를 향한 사랑

 

이 목사는 누구보다도 총신을 사랑했다. 총회장과 총신 재단이사회 부이사장으로 재임시인 1981년 3월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제일리 산 41-1번지의 22만 3,329평을 매입하여 제2캠퍼스를 마련함으로써, 총신대학교를 세계적인 개혁주의 신학교 가운데 우뚝서게 하는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영수 목사는 정부가 대학 지방분산책을 발표하기 전부터 탈(脫)서울의 계획을 펴는 데 관심을 가지고 총회센터 부지와 동시에 신학교 부지 물색을 진행시켰다. 학교당국은 여러 후보지를 찾았으나 적당한 땅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양지에 백화소주 사장 강정중씨의 임야 23만평이 회사의 채무관계로 처분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영수 목사는 즉시 강 사장과 교섭을 하였다. 5억짜리 땅을 깎아서 4억 2000만원에 매입하기로 최종합의를 보았으며, 그중 5,000만원은 강 장로가 학교에 헌금하기로 하여 실제 지불액은 3억 7,000만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농장 안에 심어놓은 관상수가 당시 시가로 1억이 넘었는데, 이것을 그대로 인수하기로 했으니 결과적으로 2억 7,000만원에 인수한 셈이 되었다는 것이다.

1981년 3월 13일,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제일리 산 41-1번지 소재 22만 3,329평의 임야 매매계약을 정식으로 체결하고, 학교에 비축해 두었던 돈 2억 5,000만원을 일시불로 지불하고 나머지 잔금 1억 2,000만원은 두 학기에 걸쳐 6,000만원씩 갚기로 하였다.

이 땅은 결국 평당 1000원씩 주고 산 셈이었으나, 30년이 지난 지금은 2,000억이 넘는 재산이 되었다.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밖에 안 되는 곳에 이 정도의 땅을 확보했다는 것은 총신대학교에 넘치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 목사의 '총신사랑'을 보여주는 것으로, 필자에게도 몇 가지 기억되는 일이 있다. 그중의 하나는 사당동 캠퍼스의 학생회관을 신축할 때였다. 학교를 방문한 이 목사는 계단의 높이가 높은 것을 보고 '계단 높이가 이렇게 높으면 여학생들이나 다리가 불편한 학생들이 다니기 불편하다고 계단을 낮추라'고 인부들을 현장에 지켜서서 격려하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그의 열정은 학교 일에 대한 간섭과 관여로 오해되어 그의 '총신사랑'은 외면당하고 학생들의 '이영수 목사 물러가라'는 플래카드와 함께 퇴진요구 데모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통일 찬송가의 발행

 

이영수 목사가 한국 교회 전체를 향해 남긴 업적 중에 <통일찬송가>의 편찬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새찬송가>, <합동찬송가>, <개편찬송가> 등 세 종류로 나누어진 찬송가를 하나로 묶는 사업을 주도하였다.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던 찬송가가 하나로 된다는 것은 단순한 출판차원의 일이 아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일치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며, 비록 교파는 달라도 '하나의 성경, 하나의 찬송가'라는 아름다운 전통을 일구어 내는 일이었다.

한국찬송가공회의 공동회장을 맡은 이영수 목사는 찬송가를 통한 복음선교를 시도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군선교용 찬송가 10만부를 발행하여 군대에 기증한 일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찬송가 발행이 이익을 추구한다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선교사역을 위한 교회들의 뜨거운 협력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그는 이제 고인이 되었지만 한국교회 역사에서 통일찬송가 발행은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일일 것이다.

 

대학설립의 꿈과 마지막 모습

 

이영수는 기독교대학을 세우는 꿈을 가지고 오늘의 중부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학교의 신축으로 인한 재정난과 교계 정치 투쟁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목사 면직과 복직이라는 아픔을 당하였다.

이영수는 1987년 12월 2일 향년 60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때 필자는 웨스트민스터에서 박사논문을 마무리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었다. 그때 이 목사의 딸의 집에 모여서 추모예배를 드린다는 연락을 받고 남편과 함께 참석하여 한국에서의 장례식 비디오를 시청했다. 지금도 그 참석자의 면모를 기억한다. 황규석 목사의 사모, 박상구 장로 내외, 김인환 목사 내외, 이 목사의 딸네 식구와 우리 내외뿐이었다. 이 목사의 생전에 모여들던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겨우 몇 사람만 모여 예배를 드렸다. 필자의 남편은 후일에 「이영수 목사 그 삶과 꿈」이라는 전기를 쓰기도 했다.

이영수 목사, 그는 갔으나 그의 삶의 자취는 남아 있다. ◇


 

필자 정정숙 교수

 



정정숙 박사는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사회학 (문학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신학석사),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교육학석사)), 미국 리폼드신학대학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기독교교육학(기독교교육학석사)을 전공하였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상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목회상담학박사)를 받았다. 또 미국 로욜라대학교(Loyola College of Maryland)에서 이상심리학을 전공하였고(Ph.D.Cand.), 남아프리카공화국 스텔렌보쉬대학교(University of Stellenbosch)에서 기독교상담학을 전공하여 신학박사(Th. D.)학위를 받았다.

그후 정교수는 36년간 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상담학 교수로 ■상담대학원장 ■교육대학원장 ■사회복지대학원장 ■도서관장 ■기독교교육연구소장등으로 섬기다가 은퇴하였다. 정교수는 또한 한국성경적상담학회장, 한국인간발달학회 이사, 미국상담학회(ACA)와 미국 심리학회(APA),그리고 미국기독교상담학회(AAPC)의 정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교수는 서울 역삼동에 한국상담선교연구원을 개원하여 목회자와 사모, 평신도를 위한 상담교육과 실천에 힘써왔으며 계간학술지 「상담과선교」를 창간하여 70호까지(2011년 여름호 현재) 발행해 왔다.

저서와 논문 및 수상으로는 운정 정정숙 전집(전 35권)과 기타 10권의 저서와 34권의 역서 간행 및 102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서 「기독교상담학」은 기독교출판문화상 신학부문 최우수상을 받았고, 인간발달과 상담Ⅰ,Ⅱ」는 총신학술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은퇴시에는 대한민국 근정포장 및 훈장(이명박대통령상)을 받은 바 있다.

현재는 총신대학교에서 명예교수로 섬기면서 일본 고베신학교 초빙교수로, 한국상담선교연구원 원장으로, 한국성경적상담학회 고문으로 사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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