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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로 간 사람들 [1]

[ 2022-01-11 11:16:25]   

 

세상 영화보다 주님만 바라보고

정정숙 박사


주님께서는 '좁은 길'로 가라고 하셨으나 우리는 넓고 편한 길을 택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좁은 길로 간 사람들'의 모습을 정정숙 교수가 새롭게 추적합니다. (편집자주)

 

새로운 연재의 주제로 '좁은 길로 간 사람들'을 기록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남들의 박수를 받는 무대 위의 사람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이웃을 섬긴 이들입니다.


한국교회
130년의 역사 가운데 수많은 헌신자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30명을 골랐습니다. 무슨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필자가 임의로 선정하였습니다. 필자 나름의 기준은 진심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긴 사람들입니다. 필자가 알지 못하는 분이 계시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한센병 환자의 아버지 최흥종 목사

 

'선교사의 헌신에 감동받아 한센병자 돌봄

독립운동과 사회활동으로 지역사회에 큰 영향'

 

처음으로 모시는 분은 오방 최흥종(崔興琮) 목사입니다. 이분은 목회, 구제, 사회, 선교 그리고 독립운동 등 다양한 사역을 하신 분입니다. 최 목사의 이야기를 소설가 문순태 씨가 소설화하기도 하였고, 그의 고향 광주에는 그를 기리는 도로명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사역의 전부를 소개하기 보다는 한센병 환자를 위한 사역을 중심으로 기록하려고 합니다
.


오방
(이하에서는 최 목사를 그의 호대로 '오방'이라고 표기합니다)1880년 오늘의 광주광역시 불노동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대한제국 순경으로 일하다가 예수 믿은 후에 사직하였습니다. 그는 순경으로 일하면서 의병을 살려준 것 때문에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서 죽을 고비를 겪었습니다.


오방이 한센병 환자를 돌보게 된 것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기막힌 일입니다
. 우리는 한센병 환자 사역이라고 하면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손 목사님의 사역과 순교는 한국교회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한센병 환자 사역의 원조는 오방 최흥종 목사님입니다.


오방에게는
<한센인의 아버지>라는 이름이 따라 옵니다.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사연이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오방은 1908년 양림동에 있는 선교부에서 선교사 웰손 의사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 집사로서 선교사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미국 남장로교 광주선교부에서 목사이며 의사인 오웬 선교사가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어서 목포에서 의료 선교를 하고 있던 포사잇 선교사를 광주로 급히 불렀습니다
.


교통이 불편하던 그 시대여서 포사잇 선교사는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배를 타고
, 영산포에서 광주까지는 나귀를 타고 가야 하는 험한 여정이었습니다. 나주를 지나가려고 할 때 길가에 쓰러져 신음하며 죽어가는 여인이 있어 포사잇 선교사가 당나귀에서 내려서 일으켜 보니 그 여인은 한센병 환자였습니다.


포사잇 선교사는 여인을 안아서 나귀에 태우고 자기는 당나귀를 끌고 광주까지
40리 길을 걸어왔습니다. 광주에 오니 오웬 선교사는 이미 숨을 거둔 상황이었습니다.


포사잇은 한센병 환자인 그 여인을 제중병원 앞까지 데려고 와서 당나귀에서 안아 내리는데 환자의 지팡이가 땅에 굴러 떨어졌습니다
. 때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최흥종 집사를 보고 포사잇은 '여보시오. 미안하지만 그 지팡이를 좀 집어 줄 수 있겠소?'라고 했습니다.


한센병 환자의 진물이 묻은 얼룩진 지팡이여서 오방은 당황하여 한참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집어주었습니다
. 오방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서 깊이 반성을 했습니다.


'
포사잇은 외국인으로 낯선 나라에 와서 한센병 환자를 살려주려고 애쓰는데 나는 동족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라고 자책했습니다.


포사잇 선교사는 빈민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찾아가서 전도하고
, 집 없는 거지들을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해 주고 먹을 것을 챙겨주고 있어서 사람들은 포사잇을 '작은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포사잇의 사역에 감동한 오방은 자기의 토지를 포사잇의 선교사역에 기증하였고
, 자기도 일생동안 한센병 환자를 돌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오방은 거리를 배회하는 한센병 환자들을 모아서 광주나병원에 수용하고 치료하였고
, 이 병원을 여수로 옮겨가서 <애양원>이 되었습니다.


오방은 광주중앙교회 장로로 있으면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고
, 3.1운동을 주도하여 6개월간 감옥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22년 광주중앙교회 목사가 되었고, 광주 YMCA를 창설하였고 초대 회장이 되었습니다.


1923
년 장로교 총회에서 시베리아 선교사를 모집할 때 자원하여 시베리아로 갔습니다. 독립군 700여 명이 러시아군에게 학살당했을 때 러시아 당국을 찾아가서 항의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이듬해에 러시아 정부는 오방을 추방했습니다. 1927년 시베리아에 다시 가려다가 체포되어 스파이 혐의로 사형장까지 끌려갔다가 기지로 살아났습니다.


오방은 광주로 돌아와서 한센병 환자 구제사업에 열중했습니다
. 오방이 환자를 업어서 광주나병원에 입원시키면 쉐팅 선교사가 옷을 갈아입히고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오방은 생전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시설로 삼애원과 호혜원을 세우고, 결핵환자를 위해서 송정원을 세운 '한센병 환자의 아버지'로서 좁은 길로 간 사람입니다.

 

(2) 성경에 매료된 생활경제인 오종덕 목사

 

'성경에 매료되어 평생 성경연구에 몰두

절제생활로 교회와 사회에 헌신하기도'

 

어떤 분야에서 독특한 영역을 개발한 사람을 '장인'이라고 합니다. 평생을 그 분야에 몰두하여 남들이 따라가기 힘든 세계를 일구어 놓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탐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기본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것을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


성경신학자 박윤선 목사가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특강을 할 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 '한국에 가면 유명한 성경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평생 성경만 연구하였고, 성경만 아는 목사님이십니다. 그는 학위가 없지만 학위 이상의 인정을 받는 성경에 박식한 분이십니다. 그는 살아있는 성구사전입니다. 나는 성구사전에서 찾지 못하는 것을 그분에게 물어보고 알아냅니다. 그분은 나의 성경 선생님이십니다.'


'
살아있는 성구사전'이라 불리운 오종덕(吳宗德) 목사님이 이 땅에 사시다 가신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성경 사랑'의 열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종덕 목사는 1891414일 평안남도 평원군 검산면 송양리 521번지에서 오달전 씨의 3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많은 농토를 가지고 있는 중농의 농부였습니다.


1898
년 오종덕이 7세가 되던 해에 모친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가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0살 되던 1901년에 삼성소학교(三成小學校)에 입학했습니다. 그의 집이 있는 송양리에는 학교가 없어서 소둑리에 있는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기울어진 가정 형편으로 삼성소학교 4학년에 중퇴했습니다.


그는 공부하고 싶은 일념으로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 '새경은 필요 없고 적당한 시간에 학문을 익혀 주시면 됩니다.'라는 조건으로 어느 대농가의 머슴이 되어서 5년간 일했습니다.


그는
1903년에 복음을 받고 검산면 소재지에 있는 교회까지 뛰어 다녔습니다. 아버지에게도 전도하여 온 가족이 예수를 믿고 그 마을에서 첫 신앙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는
1905425일에 배위량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성경을 읽는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남의 집 머슴살이를 그만두고 세부측량학교에 입학하여 측량기사가 되었으나 그는 더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때마침 아는 분의 권유로 평원군 공전면 신화리의 화평소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보통학교 교원강습소를 수료하고
19129월에 송봉소학교(대동군 부산면 태양동 소재)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직업에 종사했습니다
. 토지조사국 서기와 수원군청 축산조합 서기를 거쳐서 일본으로 가서 토기회사에 근무하였습니다. 대구로 돌아와서 곡물상을 하다가 정미소를 운영하였습니다.


그는 안동교회 이대영 목사
(후에 중국 산동성 선교사)의 중매로 19229월에 32세의 노총각으로 18세의 김순덕과 결혼을 했습니다.


이대영 목사의 권유로
19252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19283월에 평양신학교를 23회로 졸업하고, 그해 6월에 경북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았습니다. 그는 경북 현풍교회에서 2년 시무하다가 1930년에 대구 중앙교회로 옮겼습니다.


신사참배 강요의 바람이 불어오자
193710월에 평북 철산군 백양면에 있는 풍천교회 목사로 임지를 옮겼습니다. 그러나 일본 형사들의 감시 속에서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는 성경연구에 몰두했고, 그에게 성경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 들어서 성경연구와 경건생활의 공동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후 해방의 기쁨 속에서 오종덕 목사는 여러 교회의 사경회를 인도하였고
, 후학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려고 대구고등성경학교를 세워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부산에 고려신학교가 세워진 후에 고려신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고
, 부산 부민동에 고려고등성경학교를 설립하여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 성경학교에서 부민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는 평생을 성경을 연구하여 가르쳤고 수많은 전도자들을 키워냈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성구사전', '성경박사'라는 별명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종덕 목사의 '절약적 경제론'은 그의 성경연구만큼 유명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아끼고 절약했습니다. 그렇게 절약하는 것은 돈을 모아서 부요를 누리고 가족들에게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학생들과 교회와 총회에 헌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가족들에게는 인색했는데 겨울에도 그의 집은 난방을 하지 않았습니다. 신학교에는 난방 시설이 없는데 집에서 난방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근검절약하여 아껴서 모은 돈을 교회와 총회에 헌금했습니다
. 1년 수입을 예상하고 연초에 십일조를 미리 바치고, 주일 헌금과 감사헌금은 손에 잡히는 대로 했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학비를 주지 않고 자기가 벌어서 조달하도록 했습니다
. 간혹 학생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면 물건을 주고 행상으로 팔아오게 했습니다. 이것은 생활철학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양복만은 최고급 양복을 입었습니다
. 그의 절제생활과 어울리지 않아서 그의 제자가 그 이유를 묻자 그는 '고급 양복은 10년을 입어도 새 양복이기 때문에 가장 경제적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사치가 아니라 경제성을 고려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주머니에는 지갑이 두 개였습니다
. 하나는 공적 지갑으로 개척교회나 신학교, 교회 등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사적 지갑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거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는 독학으로 성경을 통달하고
, 절약으로 모은 돈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197616일에 하나님 나라로 옮아갈 때 전 재산을 교단에 바친 우리 시대의 '순수한 기인(奇人)'임을 기억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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