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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총회장 왕길지(王吉志)목사 (3)

[ 2010-12-10 15:24:16]

 

< 2대 총회장 왕길지목사>

(Gelson Engel, 1864-1939)

 


왕길지목사는 1907년 독노회가 시작할 때 부인의 소천으로 잠시 호주로 귀국 중이었으며 1907년 다시 재혼하여 돌아올 때까지 제1회 독노회에 참석치 못하고 부산진교회 심취명장로를 총대로 보내었다. 1908년 9월에 제2회 독노회가 서울 안동교회에서 모였을 때부터 정식으로 총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1909년 제3회 독노회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며 1910년 제4회 독노회에 총대로 참석하여 경상대리회를 남북으로 나누어서 모이도록 허락을 받았다.

1911년 제5회 독노회가 대구 남문안교회에서 모일 때 남경상대리회 8명의 목사 선교사와 6명의 장로총대와 함께 14명이 참석하였다.

(목사:왕길지, 매견시, 심익순, 위철지, 인로절, 나대벽, 맹호은, 손안로

장로:김봉명, 김응진, 리윤광, 리현필, 심취명 정덕성)

그 후 1911년 12월 6일 남북경상대리회가 제1회 경상남북도노회로 부산진교회에서 모여 왕길지목사는 노회장으로 피선되었으며 그의 관할 지경은 부산진당회와 부산부 동편(7교회 담당조사 김만일)과 언양 그리고 울산 서북 편을 관할하기로 하였다. 왕길지목사는 1912년 8월에 모인 제4회 노회까지 2년간 노회장을 연임하였으며 1912년 12월에 모인 제5회 노회는 안의와목사에게 노회장을 물려주었다.

 

1913년 9월7일-11일까지 서울 승동교회(개회예배:소안동교회)에서 모인 제2회 총회에서 49세의 왕길지목사는 총회장에 피선되어 일 년 동안 한국 장로교 총회를 이끌었다. 부총회장은 한석진목사 서기 김필수목사 부서기 김선두목사 회계 시락수선교사 부회계 김석창목사가 선출되었다. 제2회 총회는 목사 89명 장로 40명 총129명의 총대가 모여서 회무를 진행하였으며 이중 선교사가 52명이었으니 한국인 목사 37명이 총대로 참석하게 된 것이다.

총회에서는 상정된 안건 중에 승동교회가 남녀 간 휘장을 치고 예배를 드린 문제였지만 총회는 당회의 형편대로 조심스럽게 시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목사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을 언권위원으로 참석하기로 결의하였으며 후에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이때부터 선교사가 사역 중 본국으로 귀국하여 총회에 참석할 때에는 언권회원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결의하였다.

총회장 재임기간중인 1913년 12월31일에 모인 제7회 경상노회에서 부산진교회 출신 심취명목사를 부산진교회 왕길지목사와 동사목사로 청빙하여 위임을 받고 일하게도 하였다.

총회장의 임기를 마친 1914년 9월 6일-9일까지 열린 제3회 총회에서 배유지목사에서 고퇴를 물려주고 증경총회장이 된 왕길지목사는 소속된 경상노회의 교회들을 지도하는 일을 하였으며 1916년 제5회 총회에서 경북노회와 경남노회를 발전적으로 분립하도록 허락을 받고 그해 9월 20일 경남노회를 조직하고 초대와 2대 노회장(1916-1917년:1회-4회)으로 노회를 섬겼으며 노회내의 관할 교회들을 돌아보았다. 1917-1919년 제8회 총회까지 경남노회 소속 선교사이며 노회장으로 총회에 참석하였다. 1919년부터는 평양신학교 전임교수로 부임하므로 경남노회를 떠나 평남노회로 소속되었으며 가족과 함께 평양에서 생활하였다. 그 후 평남노회의 분립으로 평양노회 소속 선교사가 되었으며 1921년 제10회 총회부터 평양노회 소속 선교사로 총회에 참석하였다. 1920년부터 18년동안 개역성경 번역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7년에 개역성경을 편찬하였다. (번역위원:레이놀즈, 왕길지, 베어드, 남궁혁, 김인준)

왕길지목사는 호주장로교회 선교부 소속 선교사이지만 선교 후반부에는 평양에서 20여 년 동안 왕성하게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가르치는 사역과 집필 활동을 하다가 일제에 의해 신사참배 강요가 심해지고 급기야 총회의 결의로 의무적으로 신사참배를 강행하는 어려운 문제가 총회와 신학교에 가해질 기운을 감지된 시기인 1937년 9월 73세로 선교사와 평양장로회 신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멜버른으로 귀국하였으며 1939년 5월 24일 멜버른에서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하였다. <끝>

자료제공: 장영학 목사(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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